벌러널드에서 가슴이 벌렁벌렁

벌러널드에서 가슴이 벌렁벌렁

2020-08-27 0 By Adam and 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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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브)는 여행할 때 장소보다는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최근 인식하게 되었다. 숨 막힐 정도의 절경, 고색창연한 건축물, 군침 돌게 하는 음식 등은 여행을 즐거운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모든 것들도 다른 사람과 인간적인 상호 관계가 없다면 내게는 앙꼬 없는 찐빵처럼 느껴지고 기억의 끈끈이에 그다지 오래 붙어있지 못하는 듯하다.

한편 어떤 곳은 우연히 만난 사람 또는 예기치 않게 벌어진 에피소드로 인해 흥미로운 추억거리로 오랫동안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는 경우도 있다.

벌러널드(Balranald)가 바로 그런 곳 중의 하나로 별 볼일 없는 곳이지만 그곳 사람들과의 소소한 인간관계 덕분에 아담과 나는 지루할 수도 있었던 시간을 재미있게 보냈고 흥미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었던 곳이다.

벌러널드(Balranald)는 어떤 곳?

벌러널드는 호주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 주의 작고 한적한 아웃백 타운으로 한때 활발했던 머럼비지 강(Murrumbidge River) 가에 있는 내륙 항구로서의 잔재가 남아있다.

벌러널드는 유명한 멍고 국립 공원(Mungo National Park)을 갈 때 기지로 삼을 수 있는 몇 개 안되는 타운 중의 하나이다.

머럼비지 강 (Murrumbidge River)

볼거리 / 할 거리

  • 박물관
  • 아트 갤러리
  • 카페
  • 옝가 국립 공원 (Yanga National Park)

타운 자체는 굉장히 작기 때문에 주요 도로를 따라 형성된 타운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약 5~10분이면 걸어갈 수 있고 볼만한 곳을 다 둘러보는데 약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보잘것없는 벌러널드에서 우리가 흥미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타운의 정보 센터에서 일하는 활달한 여성 직원 덕분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박물관 문을 – 열쇠를 직접 들고 와서 – 열어주고, 타운에 유일무이한 아트 갤러리가 열려있는지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등 마치 개인 비서처럼 우리를 돌봐주었다.

박물관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 지역의 사업 거래를 기록해놓은 공식 서류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일상 용품과 도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중 우리는 1905년 경에 처음 출판되고 1950년에 재판된 ‘여성 가정 처지 안내서(Ladies’s Handbook of Home Treatment)라는 제목의 호주 일반 가정 의학 설명서 한 권을 발견했다. 이 책은 과거 한국의 여학생들이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던 가정/가사 책에 나왔던 정도의 성교육과 함께 결혼에 대한 조언을 포함하여 가족의 건강을 돌보는 책임자로서 주부 또는 엄마들이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만한 많은 의학 정보가 담긴 가정 상비 지침서이다.

우리는 책이 발행된 이후 우리 사회의 성(sex)과 결혼에 대한 사고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나는 박물관에서 이 책을 빌려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 책 여러 권이 이베이에 매물로 나와있었고 결국 나는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오래된 인쇄본을 살 수 있었다. 100년 이상 된 골동품을 – 가치가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 – 손가락 몇 번 두들겨 쉽게 매매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모순으로 느껴졌다.

정보 센터에서 근무하는 중년의 여직원은 타운의 아트 갤러리가 여러 명의 올드 레이디들이 운영하고 있는데 이분들이 갤러리 여는 것을 까먹을 때가 종종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그녀가 갤러리 할매들에게 매번 전화해서 일러주곤 했다는데 이제는 지쳐서 전화하는 것을 아예 포기했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가볼 만한 곳을 찾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그녀는 다시 갤러리 할매들에게 전화를 걸어 문을 열었는지 확인하고 알려주었다.

아담과 내가 박물관을 둘러보고 아트 갤러리에 들렸을 때 나는 기억력이 빠르게 퇴화되고 있는 70 ~ 80 대의 늙고 기력 없는 할매가 앉아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기억력이 깜빡깜빡하는 것으로 전해 들은 사람은 할매가 아니고 세련되고 활기찬 50대 정도 밖에 안돼 보이는 젊은 분이었다 – 요즘의 50대는 아직 팔팔한 젊은이에 속한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 보자 하니 이 타운에서는 아줌마들이 서로를 ‘늙은이’로 부르는 듯했다.

작은 벌러널드 타운에는 먹을 곳이 그다지 많지 않고 제대로 된 유일한 카페는 정보 센터 건물 바로 맞은편에 있다. 이 카페에서는 커피와 케익은 물론 아침과 가벼운 점심 식사를 제공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커피와 함께 치즈케잌을 먹었는데 그 맛이 한마디로 절묘했다.

벌러널드 바로 외각에 옝가 국립공원이 있다. 보통 좋은 시기에는 이 국립공원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곳에 갔을 때는 호수의 물은 다 말라붙고, 차가 다닐 수 있는 트랙은 폐쇄되었고, 강에는 독이 있을 듯한 잿빛을 띤 연녹색 물이 흐르고 있는 등 삭막하고 애처로운 상태였다.

우리는 차로 국립공원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좋은 곳을 찾아보았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아담은 트랙 옆에 있는 풀숲에서 죽은 이뮤(emu)의 두개골을 발견해 기념품으로 주워온 것이 전부였다.

옝가 국립공원에 있는 옝가 목장의 옛날 집

전형적인 도로가 모텔 투숙 경험

우리는 벌러널드에 오기 전 온라인으로 숙소를 검색해 이 타운에 있는 3개의 모텔 중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곳에 3일 밤을 미리 예약해 놓았었다. 도착해 보니 예약해 놓은 모텔은 벌러널드 타운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가에 있었고 바로 옆에 있는 클럽 소유주가 운영하는 모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아웃백으로 여행을 떠나온 지 두 번째 날 이 모텔에 체크인을 하고 배정받은 방은 도로 바로 옆에 있었고, 방의 한 쪽 벽면이 이 모텔 부지의 담벼락 역할을 하는 이상한 구조였다.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차와 인도를 지나가는 행인들의 소음이 염려되어 나는 아담에게 방을 바꿔달라고 요구해 보라고 했지만 아담은 벽이 두꺼우니 괜찮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가 하는 말에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나는 까다롭게 굴기 싫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텔의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 레스토랑 겸 게이밍 클럽에서 이른 저녁을 먹은 후 방으로 돌아와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저녁 시간을 보내고 일찍 취침에 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클럽에서 젊은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듣자 하니 3개월이라는 오랜 락다운이 해제된 후 처음으로 친구들과 모여 술을 좀 마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취객들이 우리 방 가까이 지나가는 것을 방 안에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우리 방문을 쾅 하고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아담은 번개처럼 방을 가로질러 문을 활짝 열어젖혔지만 문을 두드렸던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아담은 문을 닫고 앞마당 겸 주차장으로 더 나가서 이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뭐야? 왜 우리 문을 두드리고 난리야? 응~?”

나는 아담의 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에 겁이 버럭 나기 시작했다. 아담이 지금까지 20년 넘게 무술을 연마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깡패들과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도망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여러 차례 나한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술 취한 젊은 장정 일당을 혼자 대항하다니…

나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볼 수 없었지만 서서히 주정뱅이들의 소란은 잦아들었고 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아담은 모텔 접수계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방을 바꿔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모텔방이 모두 찬 상태였기 때문에 불행히도 우리는 체념하고 3일 동안 선잠을 잘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했다.

나는 아담과 침대에 나란히 누워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Enrique Iglesias)의 2001년 싱글 ‘히어로 (Hero)’ 곡의 단편 영화 스타일 뮤직비디오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엔리케 자신과 섹시한 제니퍼 러브 휴잇 (Jeniffer Love Hewitt)이 주연하는 뮤직비디오에서 이 한 쌍의 연인은 조직폭력배들로부터 도주하는 과정에서 에어컨도 없는 사막의 한 모텔방에 들어가 훔친 돈을 뭉개고 태우며 후끈한 사랑을 나눈다.

이 섹시한 장면을 회상하며 아담에게 말했다.

나 : “뮤직비디오나 영화 속에선 싸구려 모텔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참 섹시해 보인단 말이야.”

아담 : “그치. 더 조잡해 보일수록 더 섹시하지.”

나 : “그럼, 이 모텔이 자기한텐 충분히 조잡해 보여?”

아담 : “아니. 더 조잡하면 더 좋지.”

나 : “우리 이번 여행 동안 투숙하는 모든 모텔에서 사랑을 나누는 거야. 어때”

물론 내 제안에 아담은 기꺼이 동의했다. ( 반사막의 NSW 아웃백은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황량한 사막의 풍경과 약간 흡사하다).

갑자기 촌스러운 싸구려 모텔에 묵는 것이 섹시하게 생각되었고 우리 둘은 지금보다 더 볼품없는 모텔방이 걸릴 수도 있다는 점이 두렵기보다는 오리혀 기대할 만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말한 수 있는 것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묘미는 아름다운 곳을 구경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만의 스토리와 추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낭만적인 영화나 뮤직비디오처럼…

흥미로운 사실

  • 호주 전역에 운영되고 있는 도로가 모텔은 5,000개 정도가 있다.*
  • 시드니 전역에 있는 101개의 모텔을 카탈로그에 담은 브렛 페트맨 (Brett Patman)에 따르면 어떤 모텔의 ‘조잡함’은 주인이 일부러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2020년 8월 18일 자 ABC 온라인 뉴스 중 오은 제크스 (Owen Jacques)의 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