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와인의 수도, 버로사 (Barossa)

호주 와인의 수도, 버로사 (Barossa)

2021-04-25 0 By Adam and Eve

와인과의 인연

아담의 아버지는 몇 년 전까지 해마다 집에서 와인을 직접 담그셨다. 집 건물 밑에 있는 지하 창고를 와이너리와 와인셀러로 사용하셨는데 새 포도주가 발효되는 시기에는 그 퀘퀘한 냄새가 마룻바닥의 틈새로 들어와 와인셀러 바로 위에 있던 거실에는 잠깐만 앉아 있어도 와인을 몇 잔 마신 듯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사전 지식도 경험도 없이 사람들한테 주워들은 정보를 가지고 취미로 담는 그의 와인은 해마다 맛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런데 가끔 기막히게 좋은 와인을 탄생시키는 지적을 이루실 때도 있었다.

아담이 당시 여자친구였던 나를 부모님 집에 처음 초대했던 크리스마스 날, 칠면조 요리와 함께 하는 융성한 가족 만찬에 아버지는 손수 담그신 와인을 내놓으셨다. 일반 와인병이 아닌 2리터의 크고 투박한 올리브오일 병에 담아낸 이 소박한 와인은 겉보기와는 달리 어찌나 맛있고 술술 넘어가던지 나는 초면인 가족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계속 받아 마셨다. 나의 주님이 그동안의 진 엔 토닉에서 와인으로 전향되는 순간이었다.

아담도 평소보다 아버지의 이번 와인이 훨씬 맛있다며 계속 잔을 기울였다. 결국 과음을 한 아담은 운전을 할 수 없어 다음날 새벽이 돼서야 나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었고, 나는 처음부터 그의 가족들에게 자유분방한 술고래로 강렬한(?) 인상을 확실히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그 후 아담과 내가 결혼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의 수재 와인은 한국의 가족들과 처음 상견례를 하는 자리에서도 우려했던 언어와 문화 장벽을 순식간에 허물었고, 와인 제조 방식을 한국 가족들에게 전수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주요 화제를 제공하는 등 친선 외교의 일등 공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와인과의 인연은 점점 진화하여 아담과 함께 전문 와인바를 들락이고 와인 시음 코스에 다니기도 하며 와이너리를 전전하는 등 오묘한 와인의 세계로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호주 와인의 영웅, 시라즈 (Shiraz)

Shiraz

와인은 포도가 재배된 지역의 기후와 토양, 지세 등의 자연환경과 와인메이커의 철학과 기술, 노하우가 함께 융합하고 작용하여 만들어낸 종합 화학물이다. 따라서 어떤 환경에서 자란 포도를 가지고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따라 와인의 맛과 품질 성격이 좌우된다.

와인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프랑스 와인은 세련되고 우아한 서울 아가씨와 같다면 호주 와인은 박력 있고 화끈한 경상도 사나이와 같다. 그리고 이 경상도 사나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시라즈(Shiraz)인데, 시라즈는 19세기 초 호주에 도입된 여러 원조 포도 품종 중에서 호주 내에서 가장 인기를 모으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맛과 품질을 인정받으며 큰 명성을 얻고 있어 호주 와인의 영웅으로 자리를 굳이고 있다.

시라즈 포도나무는 비교적 환경에 잘 적응하고 서늘한 지역에서부터 따뜻한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기후 조건에서 잘 자란다는 장점이 있어 호주 전역의 모든 와인 산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포도가 자란 자연환경이 다르고 이에 와인메이커의 창의적 기법이 더해져 다양한 스타일과 품질의 와인을 생산해내고 있는데, 그중 호주에서 시라즈 와인 생산지로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곳은 남호주 (South Australia)에 있는 버로사 (Barossa)이다.

버로사(Barossa)에 대하여

버로사는 따듯한 기후의 버로사 벨리(Barossa Valley)와 약간 서늘한 기후의 이든 벨리(Eden Valley)를 아우르는 와인 지역으로 170년 이상의 와인 메이킹 역사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 지금도 여전히 포도를 생산해내고 있는 고목의 포도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버로사에는 5-6 세대째 포도를 경작하고 와인을 제조하며 전통을 이어온 와인 대가들이 있는가 하면 소규모 부티크 스타일 와인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 와인 메이커들이 나란히 공존한다. 따라서 버로사는 다양한 스타일과 광범위한 품질의 와인을 시음해 볼 수 있는 자연 속의 와인 박람회장과 같다.

호주의 수도 에들레이드 (Adelaide)에서 북동쪽으로 1시간 운전 거리에 있는 버로사는 낮고 둥글둥글한 언덕에 유칼립터스 나무들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포도밭이 한데 어우러져 나른한 전원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버로사는 도심에서 가깝다는 편리한 지역적 위치와 아름다운 자연환경 그리고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와인과 수준 높은 음식 문화의 복합된 상승효과로 해외 관광객들뿐 아니라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와인을 시음하며 여유와 낭만을 즐기려는 현지인들에게도 매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버로사에 있는 수많은 와이너리를 제대로 둘러보고 시음을 하기 원한다면 최소한 이틀 정도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그리고 버로사 벨리 마을에 있는 정보 센터에서 와이너리 지도를 얻어 반드시 가보고 싶은 몇 곳을 선정하여 미리 동선을 정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버로사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다.

추천하는 버로사 와이너리

와이너리에 따라서 와인만 시음할 수 있는 곳, 간단한 음식과 함께 시음 할 수 있는 곳, 시음 공간 이외에 카페와 레스토랑 및 고급 숙소 등 부대시설이 갖춰져 있어 와인 시음은 물론 식사도 하고 원한다면 결혼식과 피로연까지 할 수 있는 곳 등 그 규모와 스타일이 와인만큼이나 다양하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버로사의 와이너리들은 그 규모나 브랜드의 유명도에 상관없이 모두 유료 와인 시음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버로사는 타지역의 와이너리와 비교할 때 정해진 단위별로 시음할 수 있는 와인의 종류가 보통 6가지 정도도 제한되어 있고 이를 시음하기 위해서 보통 $10- 30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시음 후 와인을 구매할 겨우 시음 비용은 받지 않는 곳도 있다. 와이너리마다 시음 비용에 대한 방침이 다름으로 시음을 시작하기 전에 비용과 관련된 정보를 먼저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다음은 제한된 일정으로 인해 우리의 한정된 경험만을 토대로 작성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포괄적이지 않은 와이너리 추천 목록이다.

1. 핸치키 (Henschke)

핸치키 (Henschke)는 5대째 와인을 제조하고 있는 150년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출신 핸치키 가족의 와이너리이다. 핸치키는 일관성 있게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것으로 평을 받고 있는 중간 규모의 와이너리로 금년 ‘올해의 와이너리(Winery of the Year 2021)’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핸치키 와인 중 가장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힐 오브 그레이스 (Hill of Grace) 포도밭의 시라즈인데 우리가 이 와이너리에 갔을 당시 이미 동이 나고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 100년 이상 된 포도나무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시라즈를 시음해 보았다. 그 맛과 향은? ….음, 간단히 말해 할아버지 향이 났다. 노인의 체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나무 탁자의 향, 옛날 시골집에서 쌀과 각종 씨앗을 저장하고 농기구 등을 넣어두는 광 안에서 나는 오래된 것들의 냄새, 즉 옛날 것들을 연상시키는 은은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와인을 따라주던 핸치키 직원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얘기를 한다고 전했다. 아주 특별한 향과 부두러운 맛의 시라즈였다.

버로사에 간다면 핸치키가 아니더라도 100세 이상의 할아버지 포도나무가 만들어낸 와인을 반드시 시음해 보라고 강력히 권하고 싶다. 보통 와인을 시음하는 것보다 시음 비용이 비싸긴 하지만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위치 – 1428, Keyneton Road, Keyneton, SA

2. 세인트 휴고 (St Hugo)

170년 이상의 와인 메이킹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세인트 휴고는 1850년에 지어진 낡은 건물을 근래 보수하고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시음실과 바, 고급 레스토랑까지 갖추고 있는 경관과 분위기가 모두 뛰어난 와이너리이다. 모든 와이너리가 그렇듯 여러 가지 와인을 시음해보는 대신 원하는 특정 와인 한 가지를 잔이나 병으로 구입해 마시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데 세인트 휴고는 그렇게 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이다.

세인트 휴고는 케버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산지로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쿠나와라(Coonawarra) 지역에도 포도밭이 있어 이곳에서 생산한 쿠나와라 케버네도 버로사 시라즈와 함께 시음을 해볼 수 있다.

위치 – 2141, Barossa Valley Way, Rowland Flat, SA

3. 쉐토 얄다라 (Chateau Yaldara)

70년 이상의 와인 메이킹 역사가 있는 쉐토 얄다라는 일단 건물부터 웅장하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자랑한다. 와인 시음실과 전시실 이외에 별채에 고급 레스토랑과 어린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을 위해 어린이 놀이실까지 따로 지어놓았다.

시음실이 있는 웅장한 본 건물에는 오래된 가구 및 실내 인테리어와는 대조적으로 이에 걸맞는 관리와 손길이 미치지 않아 알맹이가 빠진 빈 껍질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럽의 혼이 빠진 건축물만을 호주의 메마른 들과 나무들 사이에 살짝 옮겨놓은 실패한 모방으로 보였는데 이는 우리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사진 찍는 배경으로는 아주 좋다.

쉐토 얄다라에서는 와인 시음은 기본이고 와인셀러의 투어와 버로사 지역의 헬리콥터 투어까지 할 수 있다.

위치 – 159, Hermann Thumm Drive, Lyndoch SA

4. 제이콥스 크릭 (Jacobs Creek)

제이콥스 크릭은 대규모 단체 손님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어진 현대적인 건물의 와이너리이다. 통유리 벽을 통해 탁 트인 포도밭 전경을 보며 와인을 즐길 수 있는데 중국인 관광객들이 주 고객인지 모든 표지판들이 영어와 함께 중국어로 쓰여있다.

현재는 한산하고 좋으나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번잡하고 분위기가 않 좋을 수도 있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제이콥스 크릭과 위에 언급한 세인트 휴고는 서로 이웃하고 있고 같은 소유주의 다른 브랜드인데 두 와이너리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세인트 휴고가 아늑하고 친밀한 분위기라면 제이콥스 크릭은 공개되고 상업적인 분위기이다.

제이콥스 크릭에서도 버로사 지역 헬리콥터 투어가 가능하고 고급 코티지형 숙소도 제공한다.

위치 – 2141, Barossa Valley Way, Rowland Flat

전주비빔밥처럼 지역 이름과 음식이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쓰이듯 ‘버로사 시라즈’는 고유 명사로 통할 만큼 버로사 레드 와인의 대표이다. 한편 버로사 와인 지역에서 화이트 와인의 주역은 특히 이든 벨리의 리슬링(Riesling)이다. 따라서 버로사 벨리에 있는 와이너리에서 시음할 때는 시라즈를 그리고 이든 벨리에서 시음할 때는 리슬링을 반드시 시음해 보도록 권하고 싶다. 전주에 갔다면 어찌 전주비빔밥을 먹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