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 독보적인 주인공인 쿠나와라

흙이 독보적인 주인공인 쿠나와라

2021-06-10 0 By Adam and Eve

아버지와 와인에 얽힌 에피소드

작년 어느 날 부모님 댁에 잠시 들렸다 오겠다며 집을 나갔던 아담이 채 한 시간도 안 돼 화가 난듯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들고 있던 빈 와인병 하나를 불쑥 내밀며 그 와인 한 병이 요즘 얼마 정도 할 거 같냐고 내게 물어왔다. 누렇게 변색되고 얼룩진 레이블을 좀 더 자세히 보니 펜폴즈 그런지 (Penfolds Grange) 1966년 빈티지였다.

아담은 자신이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한 병에 3~4천 불에 거래되고 있다며 아버지가 50년 이상 된 유명 브랜드 와인을 자기에게는 한 방울도 안 주고 혼자서 다 마셔버렸다며 실망감과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가 5분 거리에 살고 있는 외아들을 불러 함께 나눠 마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아버지의 무지함 때문에 자신이 고가의 와인을 맛볼 수 있었던 흔치않은 기회를 박탈당한 것에 대해 아담은 크게 아쉬움을 느끼는 동시에 어이없어 했다.

상황은 이렇다. 아담의 아버지는 매일 저녁식사와 함께 와인을 두세 잔에서 한 병정도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집에서 당신이 직접 담그신 와인을 마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 선물로 받거나 싸게 구입한 와인병을 딸 때도 있으시다. 그런데 아버지는 와인을 즐겨 마시고 귀동냥한 정보를 가지고 뒤뜰에서 취미 삼아 와인을 직접 담기도 하지만 와인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으신 분이다.

이런 아버지에게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내던 헝가리 출신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이삼 년 전 세상을 뜨기 직전에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오던 와인 여러 병을 친구인 아담의 아버지에게 선물로 주고 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친구가 남기고 간 와인을 골판지 상자에 담겨있던 채로 한동안 세탁실 한편에 놔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별생각 없이 한 병을 따서 평소처럼 저녁을 드시며 반주로 혼자 다 마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담이 내게 보여준 것은 그의 아버지가 다 마셔버리고 놔둔 빈 병이었다.

아담은 아버지가 얼마나 비싼 와인인지 알고 마셨더라면 훨씬 더 맛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라며 또다시 아쉬움을 표했다. (사람들은 가격이 비싼 와인일수록 맛이 더 좋다고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담이 아버지에게 맛은 좋더냐고 물어봤단다. 그러자 아버지 왈, “뭔지 모르고 마셨지만 맛은 있더라.” 🤣😤 😭

쿠나와라 (Coonawarra)란?

와인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아담의 아버지도 그 이름을 알아보시고 최고로 좋아하시는 호주의 와인 산지가 있으니 그곳은 바로 쿠나와라(Coonawarra)이다. 호주 원주민어로 허니써클(Honeysuckle)이란 의미의 쿠나와라는 최근 들어 급성장하고 있는 관광지인데 이곳을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주된 이유,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유일한 이유는 와인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도 역시 와인을 맛보기 위해 이곳에 갔다.)

한때 양털용 양을 치는 방목장과 과수원이 주를 이루던 쿠나와라는 오늘날 테라 로사(Terra Rossa) 즉, 붉은색 흙에서 생산되는 탁월한 레드 와인으로 세계적인 와인 전문가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는 와인 산지이다. 특히 쿠나와라의 케버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수집하여 오래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는 와인으로 와인 컬렉터들에게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아담의 아버지가 마신 호주의 가장 명망 있는 와인 브랜드인 펜폴즈(Penfolds)도 쿠나와라에 넓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쿠나와라는 어디?

남호주와 빅토리아의 주 경계선 가까이에 있는 쿠나와라는 에들레이드에서 4시간 멜번에서 5시간 운전 거리에 있다. 시드니에서부터는 장장 13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거리이다. 한마디로 쿠나와라는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들판에 포도밭과 와이너리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오랜 운전 끝에 마침내 쿠나와라에 도착하면 네비도 지도도 필요 없다. 사방으로 평평한 지대에 비행기 활주로처럼 반듯한 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사열을 기다리는 군인들처럼 줄지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다 도로가에 있는 와이너리 표지판을 보고 마음이 끌리는 곳이 있으면 바로 들어가면 된다.

테라 로사(Terra Rossa)란?

쿠나와라에 가면 반복해서 듣게 되는 단어, 실과 바늘처럼 쿠나와라를 얘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바로 테라 로사(Terra Rossa)이다. 테라 로사는 이탈리아어로 붉은색 흙이란 뜻이다.

쿠나와라에는 석회석 지반 위에 약 50cm 깊이의 선명한 붉은색 흙이 남북으로 길이 27km, 넓이 2km 정도의 가늘고 긴 벌레 모양으로 덮고 있는데 이 협소한 면적의 짙은 붉은색 토양은 강렬한 맛의 품격 있는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일등 공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쿠나와라는 마치 체구는 작지만 강한 펀치로 평판이 자자한 권투 선수와 같다.

쿠나와라에서 와인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테라 로사가 와인에 미치는 영향과 그 명성에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쿠나와라에서 테라 로사는 거의 신성한 종교와도 같은 숭배와 찬미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테라로사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알고 보니 그 역사는 수백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쿠나와라를 포함한 인근 지역 즉 라임스톤 코스트(Limestone Coast)는 모두 바닷물에 감겨있던 해저였는데 빙하기 이후 바다의 지면이 수면 위로 상승하여 육지가 되고 석회석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후 바닷바람은 계속해서 주변에 있는 평원으로부터 고운 흙을 불어와 석회석 위에 쌓아놓기 시작했고 이렇게 축적된 흙은 산화작용으로 인해 선명한 붉은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추천하는 와이너리

윈스 쿠나와라 이스테이트(Wynns Coonawarra Estate)

윈스 쿠나와라는 1891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개척자 존 리독(John Riddoch)이 처음 이곳에 포도나무를 심고 와이너리를 설립한 것이 그 기원이다. 윈스는 쿠나와라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넓은 싱글 빈야드를 소유하고 있는 와이너리로 쿠나와라 와인의 벤치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윈스가 자랑하는 프리미엄 와인은 존 리독 케버네 소비뇽(John Riddoch Cabernet Sauvignon)과 마이클 시라즈(Michael Shiraz)이다.

이 와이너리의 건물과 시설, 주변 조경 등 모든 것이 아름답다. 우리는 윈스에서 여러 가지 레드 와인을 시음했지만 결국 나올 때는 늦게 수확한 포도를 가지고 만든 리슬링(Riesling) 와인을 두 병 구매했다. 리슬링은 아래 사진에서 보듯 백포도주용 포도 품종인데 윈스에서는 다 익은 포도를 제때에 수확하지 않고 오랫동안 남겨두어 포도알에 있던 수분이 말라 마치 건포도처럼 되었을 때 이를 수확하여 와인을 만들었다. 늦게 수확한 포도는 수분이 적기 때문에 훨씬 더 농축된 단맛이 남게 되는데 이렇게 늦게 수확한 리슬링으로 만든 와인은 꽃속의 즙같은 달콤한 황금색의 디저트 와인이 된다. 한 모금 맛을 보고는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위치 – 77, Memorial Drive, Coonawarra, SA, 5263

사진의 맨 오른쪽에 건포도처럼 말라가는 포도 송이를 볼 수 있다.

브렌즈 리에라 쿠나와라 (Brand’s Laira Coonawarra)

리에라(Laira)는 영국 출신의 헨리 스텐티포드 선장(Captain Henry Stentiford)이 1893년에 쿠나와라 한복판에 있는 토지를 구매하고 자신이 아꼈던 배의 이름을 따서 리에라라고 명명한 데서 기원한다. 통유리가 주를 이루는 현대적 건물의 시음실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낡고 오래된 헛간 건물을 알처럼 품고 있다.

저명한 태라 로사 띠의 정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브레즈 이에라는 18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100년 이상 된 포도나무를 많이 갖고 있는데 이는 당연히 브렌즈 리에라의 큰 자랑거리이다. 도로에서 와이너리로 들어가는 입구의 오른쪽에 100년 이상 된 포도나무들을 볼 수 있다.

위치 – 14860, Riddock Highway, Coonawarra, SA, 5263

홀릭 이스테이트(Hollick Estate)

아무리 좋아도 밥을 굶어가며 하루 종일 와인만 마실 순 없다. 쿠나와라에는 많은 와이너리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레스토랑에서 큰 경비를 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점심 식사할 곳을 원한다면 홀릭(Hollick)에 가면 된다. 홀릭 이스테이트는 현대식 와이너리 본관에 레스토랑이 있을 뿐 아니라 건물 앞에 작은 코티지에서 커피와 함께 간단한 테이크어웨이 음식을 살 수 있는 카페도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이곳이 쿠나와라에 있는 유일한 카페이다. 코티지는 매우 작기 때문에 음식을 사서 코티지 주변의 뜰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먹을 수 있다.

위치 – 11, Racecourse Road, Penola, SA, 5277

결론적으로 쿠나와라는 아주 외진 곳에 있고 와이너리 이외에는 다른 여가 활동을 즐길만한 곳이 전혀 없는 곳이기 때문에 멜번과 에들레이드 사이를 도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하루나 한나절 들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명성 있는 테라 로사 와인을 제대로 음미하고 와인과 함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현지 음식과 함께 여유를 만끽하기 원한다면 쿠나와라에 있는 숙소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현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최근 코비드로 인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좁고 번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넓은 공간에서 생활과 일을 겸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쿠나와라도 한창 부동산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드넓은 하늘 아래 와인을 홀짝이며 일을 할 수 있다면야 왜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