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헌터 밸리

추억의 헌터 밸리

2021-06-23 0 By Adam and Eve

처음처럼….

아담과 데이트하던 초창기 시드니를 떠나 2박 3일로 처음 여행을 갔던 곳이 헌터 밸리 (Hunter Valley)이다. 피부에 와닫는 공기가 쌀쌀하게 느껴졌던 남반구의 초봄 9월 중순이었다.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 어둠이 짙게 깔린 후에야 예약해 놓은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숙소에 딸린 작고 고전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에 없지만 서로의 미소 띤 얼굴을 마주 보며 마냥 행복해했던 것만은 기억 속에 생생히 새겨져있다.

다음날 새벽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깨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우리가 투숙한 단층의 작은 숙소는 싱그러운 들판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특정한 목적지도 없이 푸른 들판 사이로 난 좁은 시골길을 따라 여기저기 운전하고 돌아다니다 한 언덕에 이르러서는 큰 바위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구글 지도와 네비도 없던 시절이라 풍경이 예뻐 보이는 곳을 향해 무작정 운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몇몇 와이너리에 들려 난생처음 와인 시음도 해보았는데 그중 담쟁이덩굴이 타고 오르던 작고 정취 있는 와이너리 건물 앞에서 또다시 기념사진을 찍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시절이 아니라 아담이 갖고 온 사진기로 서로를 찍어주거나 아니면 아담이 차나 바위 위에 사진기를 설치해 놓고 미리 자리를 잡고 있는 내 옆으로 달려와 카메라의 빨간 불이 깜빡이고 찰칵 소리가 날 때까지 포즈를 취했었다.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옛날 방식으로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넘은 올해 다시 돌아온 결혼기념일을 맞아 헌터 밸리로 주말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다시 찾은 헌터 밸리는 추억 속의 헌터 밸리와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과거 소박하고 나른한 전원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고급화, 상업화, 대규모화된 와이너리들이 위풍을 자랑하고 있었고 가는 곳마다 몰려드는 방문객들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코비드로 인해 해외여행뿐 아니라 이웃에 있는 주로 여행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은 현실과 함께 공휴일이 낀 연장된 주말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는 후미진 기억의 뒷골목을 맴돌며 헌터 밸리를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눈에 익은 구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헌터 밸리가 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은 시골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묶었던 숙소, 바위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언덕, 그리고 담쟁이덩굴 와이너리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약간 아쉬움과 함께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변화가 서글픈지 추억을 더듬는 우리 둘의 모습이 서글픈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촉촉해짐을 느꼈다. 다음에 또 헌터 밸리에 가게 된다면 예전에 찍은 사진을 갖고 가서 어디인지, 여전히 존재하는지 현지인들에게 물어봐야겠다.

헌터 밸리는…

시드니에서 북쪽으로 약 3시간 운전 거리에 있는 헌터 밸리는 와이너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헌터 밸리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지역으로 그 역사는 초기 유럽의 정착민들이 포도나무를 심었던 182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헌터 밸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포콜빈(Pokolbin) 지역은 오늘날 과거의 흔적이나 분위기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현대적이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헌터 벨리에는 와이너리 이외에도 리조트, 골프코스, 고급 레스토랑, 주말 마켓, 농산물 마켓, 초콜릿 공장 등이 있어 취향에 따라 다양한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다. 따라서 헌터 벨리는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어린이나 부모를 동반한 가족여행객들에게도 상당히 인기 있는 곳이다. 그리고 야외 결혼식과 피로연을 하거나 우리처럼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커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와이너리 방문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헌터 밸리 여행의 핵심이다. 총 220개 이상의 와이너리가 있는 헌터 밸리는 여름 기온이 무더워 사실상 좋은 와인을 생산하기 쉽지 않은 기후 조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창의적이고 솜씨 좋은 와인 메이커들 덕분에 헌터 벨리는 세미용(Semillon), 샤도네(Chardonnay), 시라즈(Shiraz)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다. 특히 헌터 벨리의 세미용은 주목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유명 와이너리는 방문객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와인 시음을 원한다면 미리 가보고 싶은 몇 곳을 선정하여 늦어도 하루 전에는 온라인으로 예약을 해놓는 것이 좋다. 그러나 와이너리에 갔다고 해서 반드시 와인을 시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와이너리에서 레스토랑과 바를 겸 하고 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분위기와 전망을 즐기며 점심을 먹거나 와인을 마실 수도 있다.

헌터 밸리를 방문하기 좋은 시기..

겨울철 포도나무 밭은 그다지 볼품이 없다. 까맣고 앙상한 뼈를 들어내고 서있는 포도나무 행렬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싱싱한 포도잎과 함께 포도가 자라는 봄과 여름에는 강한 생명력과 비옥함을 느낄 수 있어 좋고, 다 익은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가을에는 수확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어 더욱더 좋다.

그런데 헌터 밸리는 더운 기후 때문에 포도가 빨리 자라고 익기 때문에 서늘한 기후에 있는 다른 와인 지역에 비해 포도 수확기가 2개월 정도 빠르다. 보통 헌터 밸리의 포도 수확기는 1월 초부터 3월 중순 사이이다. (수확하는 사람들이 약간 불쌍하다. 헌터 밸리에서 1월과 2월은 굉장히 무더운 여름이다.)

추천하는 와이너리

브로큰우드 (Brokenwood)

브로큰우드(Brokenwood)는 1970년 시드니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3명의 친구가 공동으로 헌터 밸리에 땅을 사고 주말에 가족, 친구, 친지들의 도움을 얻어 포도나무를 심고 취미로 와인을 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1973년에 처음 포도를 수확하여 와인을 담글 당시 이 변호사들은 와인 제조에 대해서는 완전히 일자무식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주말농장으로 시작된 소박한 브로큰우드는 그 후 전문 와인 메이커를 고용하여 꾸준히 와인을 생산하고 품질 향상에 전념해 왔는데 결과 그레이브야드 시라즈 (Graveyard Shirz) 2018년 빈티지는 2021년 올해의 와인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레이브야드는 포도밭 이름이다.)

브로큰우드는 약 3년 전 기존의 작은 셀러도어 옆에 그 이름에 걸맞게 주로 나무와 통유리를 사용하여 새 건물을 짓고 와인 시음실, 레스토랑, 바를 갖춘 세련되고 도시적인 분위기의 와이너리를 개점하였다. 와인 배럴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네다섯 개의 원형 시음 파드(pod)는 실내와 실외에 분산돼 있고 레스토랑과 바도 역시 실내외 모두 좌석이 마련되어 있어 사회적 거리 두기가 요구되는 오늘의 현실에 아주 적합하다.

20여 년 전에는 예약 없이 아무 와이너리나 들어가 공짜로 시음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주 사회에 와인 시음 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짜로 와인을 마음껏 마셔보겠다는 생각으로 와이너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와인 시음은 고객들에게 와인을 홍보할 뿐만 아니라 교육하는 좀 더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일정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우리는 미리 시음 예약을 하지 않았고 당일 예약은 이미 꽉 찬 상태였기 때문에 시음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우리는 올해의 와인상을 수상한 그레이브야드 시라즈 2018년 빈티지와 함께 2019년 빈티지를 각각 한 잔씩 사서 햇살이 따스한 베란다에 앉아 맛을 비교하며 마셨다. 확실히 수상한 와인은 맛이 훨씬 깊고 부드러웠다. 와인 시음 비용은 일 인당 $25, 서너 모금 밖에 안되는 150ml 한 잔도 $25로 가격은 상당히 비싼 편이다.

주소 – 401-427, McDonalds Road, Pokolbin, NSW, 2321

오드리 윌킨슨 (Audrey Wilkinson)

15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오드리 윌킨슨은 언덕 꼭대기에 새 둥지처럼 자리를 틀고 있어 다른 와이너리들에 비해 탁 트인 전망이 훨씬 아름답다. 오드리 윌킨슨에는 시음실과 와인 박물관 그리고 두 채의 코티지형 숙소도 있다.

와이너리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오드리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갑자기 포도밭을 가꾸고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어려운 가업을 떠맡게 되었는데 다행히 맛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탁월한 와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를 기리기 위해 와이너리를 정식으로 오드리 윌킨슨이라 명명했는데 사실 여자 이름을 가진 오드리는 남자였다고 한다. 오늘날 오드리 윌킨슨은 오드리의 후손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매수하여 소유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족이 운영하는 개인 와이너리로 남아있다.

오드리 윌킨슨에서는 와인을 3등급으로 나누어서 생산하는데 리저브(Reserve) 와인은 와이너리에서만 직접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시중에서 구매할 수 없다는 리저브 와인을 시음하고 좋으면 한두 병 구매할 생각으로 오드리에 갔다.

오드리 와인은 와인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와이너리도 방문객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우리는 고객 서비스에 있어서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예약 없이 찾아온 우리를 대하는 와이너리 주인인지 직원인지 분간할 수 없는 한 남자의 고객을 대하는 태도에서 거만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날 예약을 하고 다음날 다시 갈 수도 있었으나 거만한 태도는 밥맛인지라 다시 가지 않았다. 어쨌든 전망은 좋다.

주소 – 750, De Beyers Road, Pokolbin, NSW, 2320

티럴스 와인스 (Tyrrell’s Wines)

티럴스 와인스는 영국 이민자 에드워드 티럴(Edward Tyrrell)이 1858년에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대를 이어 그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는 성공적인 대규모 개인 와인 회사이다. 티럴 가족은 헌터 벨리에서 100년 이상 된 포도나무를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산을 마주 보며 언덕 위에 서있는 티럴 가족의 와이너리는 창립자 에드워드 티럴이 생활했던 작은 판잣집과 창고 등 옛날 건물이 원형 그대로 잘 보전되어 있어 주차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티럴 와인의 오랜 역사를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넓은 잔디밭과 이어지는 포도밭 그리고 원거리의 나무와 연못과 산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그런데 티럴에서도 역시 넘쳐나는 방문객들로 호객행위를 하지 않아도 돼서인지 와인 시음 중 우리를 서빙하는 남자 직원의 태도에서 거만함이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오전에 티럴스 와이너리에 들렀으나 시음 자리가 모두 만석이라 오후 늦은 시간으로 예약을 해둔 후 다시 갔었다.

가장 기본적인 와인 시음 비용은 한 명당 $10이나 패키지의 종류에 따라 $75에서 $750까지 한다.

위치 – 1838, Broke Road, Pokolbin, NSW, 2321

마운트 플레즌트 (Mount Pleasant)

마운트 플레즌트는 우리가 가본 헌터 벨리의 와이너리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그 이유는 마운트 플레즌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태도가 겸손하고 친근하고 쾌활하고 한마디로 ‘플레즌트’했기 때문이었다. 전반적으로 수수한 분위기의 마운트 플레즌트에서는 인생 경험이 있어 보이는 중년의 직원들이 유머와 여유 있는 태도로 고객들을 오랜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준다.

마운트 플레즌트는 시라즈와 세미용(Semillon)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 병에서 4-5년 동안 숙성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시중에 내놓는 세미용은 와인쇼에서 한결같이 뛰어난 호평을 받고 있다. 마운트 플레즌트는 2017년에 올해의 와이너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 직원의 특별한 서비스로 시음을 해보게 된 1998년 모리스 오시에 시라즈(Maurice O’Shea Shiraz)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깊은 맛이 영국 여왕의 생일 선물로도 결코 손색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가 마운트 프레즌트에 갔던 날은 Queens’s Birthday였다.)

주소 – 401, Marrowbone Road, Pokolbin, NSW, 2320

윈마크 와인스 (Winmark Wines)

대다수의 와이너리들이 밀집되어 있는 포콜빈(Pkolbin) 지역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한적할 뿐 아니라 경관이 빼어나다. 작은 셀러 도어 옆에 작은 미술관도 딸려있고 야외 조형 작품들이 여기저기에 분산 설치되어 있어 와이너리와 포도원을 자유롭게 거닐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평화롭고 그림 같은 자연 속에서 좀 더 오래 머물다 가고 싶어하는 방문객들이 부지에 있는 윈마크 소유주의 사저를 임대할 수 있겠냐는 문의가 이어져 결국 윈마크에서는 넓은 빈야드 부지에 두 개의 별채를 지어 숙소까지 운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윈마크에서 와인 시음은 무료이나 샤도네(Chardonnay)만을 전문으로 하는 와이너리이기 때문에 빈티지가 다른 샤도네만을 시음할 수 있다는 것이 약점이다.

주소 – 229, Wollombi Road, Broke, NSW, 2330

지방마다 나라마다 전반적으로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헌터 밸리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른 주에 비해 와인 문화에 품격이 결여됐다는 인상을 준다. 무엇 때문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 호주의 여러 와인 지역을 돌아보며 받은 느낌이 그렇다.

위에 소개한 와이너리들은 비록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인상을 받은 곳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권하고 싶은 곳이다. 경험은 주관적이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헌터 밸리를 방문할 때 유명 와이너리가 집중되어 있는 포콜빈(Pokolbin)에서 시작하여 포콜빈에서 끝마치는 경우가 많은데 헌터 밸리에는 이름도 예쁜 러브데일 (Lovedale-사랑골)과 한적한 시골의 분위기 속에서 좋은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브록(Broke),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듯한 월럼바이 밸리(Wollombi Valley) 등도 있으니 중심에서 좀 더 멀리 벗어나 보는 것도 헌터 밸리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